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회상 – Epilogue

gk12

비가 온다

기억이란 잊을 수 없다

언제든 가방 하나만 들면 떠날 수 있을 것 처럼 그렇게 조심스레 지내왔지만

가슴이 막힌듯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

빗소리에 내 마음을 내맡긴채 한참을 창 밖을 바라 보고 있었다

그 어느 날인가 이후 조금 시간이 지난 지금

이제야 난 다시 뭔가를 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이렇게 적는다

이 글과, 지금 내리는 비로 내 기억이 씻어지기를 바라며..

우린 시간을 잊었었다

미경이 내게 다시 온 그날 보냈던 편지대로 우린 처음 만난 날을 잊어버렸다

돌이켜서 짚어보면 모를 리 없겠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는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

만나면 내일 헤어질 사람처럼 시간을 더 쪼개고 늘리고 그렇게 아쉬워 했다

헤어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그 이후 우린 모든게 변해버린 것이다

영원하지 않다는 앎 그 자체는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었고

우린 서로의 앞에서 더 본능을 드러내고 살게 됐던 것 같다

얼마 전 미경은 결혼을 했다

2년이 조금 넘었을까..싶은 어느 날

“요즘 아이들이 예쁘다” 라고 그녀는 말을 어렵게 떼어 놓았다

셋이 식사를 하면서 본 미경의 눈에는 자애로운 사랑이 보였고,

남편이 될 그 사람은 평범한 삶으로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

결혼식 날짜가 잡혔다고 기뻐하던 날

미경에게 주었던 밋밋한 금반지를 돌려 달라고 했고,

원망스럽게 보는 그 얼굴에 “반지를 계속 낄수는 없으니 다르게 바꿔줄께” 라고 하며,

얼마 후 돌반지 두 개를 미경의 손에 쥐어주었다

둘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며…
 
이걸 보고 날 기억해주면 좋겠다고

그 날 미경은 많이 울었던 것 같다

마지막 만난 날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

다시 안만나겠단 다짐도 없었고, 거창한 이별 눈물 같은 것도 없었다

그냥 아스라이 사그러 드는 날들로 헤어짐을 잊으려 한 둘의 마음이었으려니…

그렇게 밖엔 이해가 되지 않는다

내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엔 금반지 하나가 있다

미경에겐 속여서 미안하지만 결국 이 반지를 녹일 수 없었다

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우리에겐,

이것 만이 둘의 기억을 대신하는 것이라서

미경에겐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고,
 
반대로 난 기억을 하고 싶어서 였다

결혼식에는 결국 가지 않았다

행복을 향해 가는 아름다운 미경의 모습을 볼 수 있었겠지만

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지을 자신이..

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

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뿐

결국 나도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였기에

2006년 4월

어느 비오는 날 새벽

  1. 손님
    2011/09/06, 3:59 pm | #1

    문만 열어놓고 사람은 떠난지 오래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쥔장이 다녀가셨군요.
    첨엔 소설만 보다가 님의 글을 거의 모두 보았습니다.
    이미 킹카 남편과 남들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너무나 정상적인 아니, 오히려 정상보다 더 모범적이고 수준 높을 것 같이 살고 있지만
    이렇게 님의 글에 빠져서 읽는 사람이기도 합니다.
   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극적인 바닐라?
    남편 역시 존경과 명예를 먹고 사는 직업이지만 남성과 여성으로 만날 때는 야수같지요.
    물론 스팽은 안 하지만 스릴있는 섹스는 서로에게 최고랍니다. 제가 들킬 것 같은 상황에서 진한 스킨쉽이나 섹스하는 것을 좀 좋아하고 그것을 남편도 기꺼이 받아들이고.
    그런 면에서 결혼을 잘 한 경우지요.제게 있는 스팽 기질 때문에 아주아주 조금 허전하지만.
    칼리토의 심장은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게 해주었습니다.

  2. 2011/09/02, 8:49 pm | #2

    이런 극찬을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. ^^

  3. 손님
    2011/09/02, 4:28 pm | #3

    오! 이런이런!!
    스팽 소설에서 이런 종류의 감동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.
   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고백을 끝으로 정말 감동을 말로는 표현 못하겠네요.
    님께서는 소설을 정말 잘 쓰시네요. 혹시 소설 쓰는 것이 직업이신가요?
    직업적인 소설가라고 해도 정말 표현 하나하나가 소름끼치게 와 닿습니다.
    최고입니다.
    잠을 설치게 만드는 소설을 써 주셔서 감사하게 읽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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